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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최근에 침몰이란 단어를 다른 의미들과 뒤섞거나, 뒤바꾸어 사용해봤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들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맘에 들었다. 바뀐 단어들은 이별, 먹다, 깨뜨리다, 꺼지다 따위의 것들이었다. 
 나는 '침몰'이 만드는 그 복구 불가능한 뉘앙스가 좋았다. 가령, 그와 나의 관계는 침몰했다. 라던가,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침몰했다. 라던가. 그런 것들은 가라앉아있는 배와 같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더 최근에는 소멸의 의미가 전혀 없는 의미들도 침몰과 대치시켜 문장을 말하게 되었다. 그녀는 옷을 침몰시켰고, 그는 전화기에 대고 나에게 침몰했다. 내 고양이는 내가 없는 사이 침몰해버렸고 나는 침몰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침몰해버렸다. 따위의.
 침몰과, 그에 대한 뉘앙스로 가득찬 나의 말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무력했다. 의사소통은 무위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조차도 침몰스러워 내색없는 만족을 느끼며 점점 줄어드는 대화들에 기쁨을, 아니 침몰을 하고 있었다.


2.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런 사소한 복수심이 문득문득 작은 악마처럼 들 때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로부터 나에게 온, 무력감이나 상실감, 간혹 절망이 되기도 하는 먼지 같은 일들을 나는 그것이 일으킨 감정까지도 그에게 똑같이 알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감정들을 모르길 바랬다면, 그 먼지만한 것들은 결국 쌓이고 번식해 나를 홀로 침몰시켰을 것이다. 먼지들은 때론 그런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들을 나누어 함께 침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함게 침몰해감을 느낄 때, 아아. 나는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나를, 홀로 침몰하게 만들지도 않고, 나로 인해, 나와 함께 티끌 같은 것들에 잠겨가는 그가, 그래서 나 홀로의 파국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파국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 나는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진다.


3. 
 가끔씩 나는 자려고 누워 나의 죽음을 상상하고는 하는데, 지금이 내 마지막 숨의 그 때이고, 그 때에도 나는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황망히 누워 어떤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몹시 외롭고 사랑조차 남지 않은 채로. 죽은 나를 뒤늦게 찾아올 얼굴들을 떠올리며. 마치 지금처럼.

 그리고 곧, 잠결에 멀리서 내 이름을 두어번 부르는 소리가 난다. '은정아, 은정아' 그리고는 나는 죽음처럼 잡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죽음의 순간에도 누군가 나즈막히 이렇게 내 이름을 부른다는, 어떤 암시를 가지고 잠이 든다. 

 아침이 찾아오고, 그럼에도 나는 죽지 않았다. 새 밤, 새로운 죽음, 익숙한 외로움을 기다리며 또 하루를 살게 되는 것이다.


4. 
 -타이타닉 기억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그, 배.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는?
 -응. 그 장면.
 -기억나지. 난 그... 햇살이 들어오는 복도가 좋아.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잭이 서있고.
 -턱시도가 아니라 3등 객실의 그 차림으로.
 -맞아. 그게 좋아.
 -...
 -...그런 게 좋겠어.
 -...?
 -...그런 침몰이 좋겠어. 누군가 나중에 우리를 그렇게 기억할 수 있도록. 지금의 침몰이.
 -...
 -그런 기억 말이야. 가장 안타깝고 가장 아름다울 때의 침몰.
 -과거의 영화 같은 거야?
 -아니. 계속의 환상 같은 거야.
 -...
 -침몰하자.
 -...같이.


5.
 생활이 없는 곳으로 함께 가라앉아버리고 싶다. 그대로 침전해 떠오르기 위해 몸 닳일 필요 없이. 30 Nov

 무뎌져 간다는 것도 어떤 안녕일 것인데, 이제는 그 안녕마저도 잦아드는 게 슬펐던 것도 무뎌진다. 11 Dec


6.
 고요. 침몰. 소요. 미동.
 같이 결과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부질없어지는 어떤 행위들.

 소멸이되 소멸이 아니고 의미이되 의미가 아니고
 행위이되 행위가 아닌 어떤 작은 것들.

 작아지고 작아져서 낡아지고 낡아져서 그림자만큼의 흔적만 남는
 내 우주의 소실.

 저 먼 곳에서 누군가 볼 수 있다면.
 지금은 없는 몇억광년 전의 폭발같은 마주침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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