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lle Lee
사람의 이야기다,
그 짧은 영상에서 느닷없이 승철을 만나게 됐다. 나다에서 본편을 기다리며 앞서 예고편들을 볼 때였다. 승철의 가물거리는 눈과 비뚜름하게 앙다문 입을 마주보는 순간. '아...'하고 긴장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이거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다.
같은 기분을 들게 한 영화들이 최근에 둘 있었다. 나홍진의 <황해>와 김태용의 <만추>. 둘 다 연출자의 전작들로 인해 관람 직전까지 크게 기대하게 된 영화들이었다. 연출자와 작품을 동일시해서는 안되는 거겠지만, 굳어진 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트레일러만 수도 없이 돌려 본 주제에 <황해>에겐 전작보다 더욱 치밀한 긴장과 유도를, <만추>에겐 '김태용'식의 사랑담론을 기대하고 있었다(전작이 김태용식 '가족(그리고 행복)'담론이었으니). 막상 그렇게 보게 된 <황해>는 역겨우리만치 끔찍했고, 그럼에도 불고하고 <만추>는 황홀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던 영화와 그 커다란 기대도 넘어선 영화. 그래서 이제는 영화를 보기 전에 큰 기대를 갖는 것에 스스로 주의를 하자고 다짐했었다. 트레일러나 홍보문구, 전작의 경험에 비춘 기대는 정작 실망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비단 <황해>만이 아니라, 많은 영화들이 그랬었다. <만추>같은 영화는 흔한 경험이 아니다. 개별 작품 하나 하나를 편견 없이 보기 위해 이런 기대감은 억지로라도 접어두자고, 그렇게 마음먹었었다.
그러기로 다짐했었는데, 승철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보지도 않은 영화에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 눈빛은, 거무룩한 눈동자가 곧 울음을 쏟을 것 같으면서도 뚝심있게 서리던 그 눈빛은, 정작 예고편이 끝나고 본 영화가 시작했는데도 지워지지 않았다. 퉁명스레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어눌하게 흘러나오는 승철의 말들이 아직도 들렸다.
기대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 주제에 결국 영화관에 가게 된 건 개봉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이하 내용은 스포일)
카메라는 시종일관 불안하게 흔들리며 승철의 뒤통수를 쫓는다. 끈질길 정도로. 우리에게 승철은 '타자'이며 존재 자체가 불편한 사람이니까. 그걸 보여주는 카메라는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를 볼 것인가? 계속 볼 것인가? 그 뒤를 밟아볼 것인가? 갈등하는 카메라는 관객의 불신이다. 이런 불친절한 화면에 울렁거리던 속은 그러나 모르는 새에 가라앉는다. 여전히 불안한 화면은 계속되지만 어느새 관객의 호흡이 그 안에 맞아가기 때문이다. 그건 타자였던 승철이 어느 순간 하나의 인물이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승철은 테이프로 베란다 창을 빈틈 없이, 몇겹이나 둘러 싼다. 바람이 들어와서 그렇다고 경철에게 변명하지만 그가 베란다 안쪽 문이 아니라 바깥쪽 문을 그렇게나 억지스럽게 싸맨 것은 서울의 고도가 무섭기 때문이다. 나중에 테이프를 걷어내고 문을 연 경철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던 그 고도가, 승철에겐 공포다. 언제고 살을 베어올듯 덤비는 겨울 바람같이, 칼날 선 서울의 매서움을 승철은 이겨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위태한 높이의 고도를 승철은 무서워 하고 있다.
베란다 그 구석에서 승철은 88라이트를, 경철은 말보로 레드를 핀다. 88라이트의 구깃구깃한 팩과 미끈하게 잘 빠진 말보로 레드의 양담배필터는 승철과 경철을 표상하는 극단적인 매개다. 둘 다 독한 담배. 승철에게 88라이트는 '한강의 기적', '서울의 꿈'(88담배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대표적인 저가 서민담배다)에 닿지 못하는 고단함이고 경철에게 말보로 레드는 나이키처럼 무조건 좋은 '미제'브랜드다.
틈새를 꽁꽁 쳐맨 베란다는 금세 담배 연기가 자욱해지고, 경철은 반도 안 핀 말보로 레드를 꺼버리고 방으로 돌아간다. 길게 늘어난 담뱃재를 터는 것도 조심스러운 승철은 경철의 눈치를 피해 경철이 흐트러트린 창틀의 테이프를 단단히 한다. 그런 삶의 고단함과 공포가 움츠러든 그의 어깨 위에 쏠려있다. 모든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답답하리만치 승철은 말이 없다. 변명도, 항거도, 울분도 토하질 않는다. 치이면 치이는대로 당하면 당하는대로 그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억울함을 표시하는 그 몸짓조차도 보는 사람이 아리게 조심스럽다.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으려고, 그래서 혹시라도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꼬깃꼬깃한 옷깃처럼 늘 접혀있는 승철이다.
그가 사랑하는 모습도 그렇다. 숙영은 승철의 존재도 모르고 있지만 승철은 늘 무언가의 뒤에서 숙영을 바라본다. 조심스럽게. 입은 굳게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그의 눈이 대신 말한다. 숙영을 보는 그의 눈은 이 서럽고 추운 땅에서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해준다. 교회 밖의 숙영의 양면적인 모습에도 그는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숙영의 인간적인 모습에 안도하는 투다.
말 없는 승철이 입을 열 때, 그것은 서툰 글씨를 연필로 꾹꾹 눌러 쓰듯 투박하다. '잘 할 수 있습니다.'하는 간절한 말도 어쩐지 힘을 잃게하는 말투다. 그의 그런 힘준 말들도 서울에선 도시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차 소리가 가득한 도로 복판에 너덜거리는 전단지와 찢겨진 현수막처럼, 그는 낡은 채로 변두리진다. 설 곳이 없어 계속 밀려날 뿐이다.
경철과 다투고, 결국 자신과 동일시되는 백구만이 남은 철거촌의 을씨년스런 벌판에서 승철은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한다. 백구(자신)를 지키기 위해, 이 흉물스런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열기 시작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동네 불량배들에게 복수하고, 경철에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친구를 만들려 노력한다.
모임기도 시간에, (그때조차도 승철은 둘러 앉은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가 없다)예의 그 눌러 쓴 투박하고 덤덤한 말투로 승철은 북한에서 저질렀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가 친구를 사귀지 못했던 이유가 처절한 배신의 경험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굶주림에 우발적으로 친구를 죽인 전적을 갖고 있었고, '친구'를 죽였다는 것, 그것도 옥수수 때문에 죽였다는 것은 그에게 친구의 자전(自典)적 의미를 용해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을 고해하지 않고서는 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죄사함을 받고 그는 어떻게 되었나. 북한에서의 친구가 '식량'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면 남한에서의 친구는 '돈'과 대등한 의미를 지닌 존재다. 그는 북한에서 지었던 죄의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죄를 짓는다. (이런 과정에서 보면, 승철의 '고해'는 또다른 죄를 짓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던 죄의 무게를 더는 행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기는 승철의 '구겨짐'은 새로운 승철이 되는 마지막 '접힘'이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돈)과 관계하는 법을 알게 된 승철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삶에 녹아들어간다. 쇼윈도 밖에서만 봐오던, 자기가 입고 싶었던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고, 더벅해서 둔하고 순박해보였던 머리도 짧게 자른다. 말도 못 붙이던 숙영의 앞에서는 심지어 '노래'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남들이 다칠까 구깃하게 접어놓기만 했던 자신을 펴는 법을 알아간다. 그런 변화들에서 놀랍게도 경철에 대한 부채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의 그라면 당연히 느꼈을법한 부채감은 사실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죄로 견주지 않는 사소한 일상일 뿐이고 그는 거기에도 적응한 것이다. 그것들은 숙영이 '승철씨, 우리 기도해요.'라고 말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때도 있지만 용서해 주'십사 하는 무수한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카메라는 다시 승철의 뒤통수를 쫓는다. 여전히 불안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이는 뒷모습이지만 한 때 도로변의 소음에도 못미쳐 그 외곽 언저리에 존재했었던 그는, 이제 도시의 소음들에 완벽히 섞여 더이상 어색하지 않다. 쓰레기를 뒤지던 백구도 승철이 물려주는 육포 한움큼에 행복해 꼬리를 친다. 어딘지 위협적이고 불안한 흔들림과 차들의 클랙션소리, 서울의 일상적인 풍경, 그 안에 '125'로 외면받았던 승철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노래방의 손님이 열창했던 away from home은 이제 지난 날의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승철의 노래다.
그렇게 이쪽과 하나가 되어 행복해 보이는 승철의 발치에 죽어있는 백구의 모습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말을 잃은 승철은 물끄러미, 하염없이 백구를 본다. 혀를 빼물고 죽은 백구는 젖은 도로 위에 이물이 되어 떠있다. 자기 자신이었던 백구가 그렇게 죽어있다. 죽어있는 자신을 보듯 승철은 백구 앞에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한다.(그러나 그는 이내 백구의 시체를 그냥 지나친다.)
백구의 그런 죽음은 이제야 겨우 서울살이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던 승철의 앞날을 암시한 것일까. 아니면 멍청하듯 순박하고 연약했던 승철의 모습이 사라져버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하면서도 막상 그 안에서 어떤 단어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때, 영화는 무심하게 크레딧을 올린다.
영화를 보고 나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몇년간 이렇게 빈 틈이 없는 영화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적잖을 거니 기대하지 말자란 상영 직전까지의 다짐은 기우일 뿐이었다.
이 영화를 굳이 '탈북자'에 대한 영화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탈북자란 기제는 사람, 특히 남한사회에선 변두리중의 변두리며 우리가 아무리 그들을 한 민족 한 동포라고 칭한다고 해도 우리에겐 그들이 여전히 부자연스런 존재이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준 문제들이, 그 주인공이 단지 '탈북자'라서 가능했던 일일까. 이것은 사람 전체에 대한 담론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해 놓고 무뎌져버린 수많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좋은 영화들은 삶의 현실성에 부식되어 내가 종종 잊곤 하는 '영화의 힘'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무산일기>도 그런 영화였다. 뚝심있는 심지를 두르고 있는 거대한 초를 보는 느낌. 그냥 영화 그 자체의 뼈저림, 영화의 인력, 영화의 힘, 영화가 주는 전율, 눈빛, 통곡, 날카로움, 소름... <무산일기>는 그런 것들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해 준 영화였다.
(그리고, 4년간 꾸준히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던 <애프터 미드나잇>과 <광식이 동생 광태>, 최근작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던 <만추>를 제치고 <무산일기>가 외국 영화/한국 영화를 통틀어 나의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